햄찌_

조회수 29224.03.17

Vampire.2 (소설)

#이제노 #뱀파이어 #소설임 #허구임

나는 집으로 돌아가서, 그날 있었던 일을 상기하며 후회했다. '그 질문엔 그렇게 대답하지 말걸' '과하게 수다스러웠어. 내가 왜 그랬지' '친구는 무슨, 그것도 인간이랑. 왜 그런 내기를 걸어가지곤.. 그냥 사라질걸' '늙었어. 인간들은 이제 내가 무섭지 않은거야' 그렇게 한달간 또 집에 틀어박혀 있었다. 가만히 누워있다가 질리면 가만히 앉아있고, 가끔은 서있었다. 하지만 그런 의미없는 하루를 흘려보낼수록, 자꾸 그날의 일들이 머리속에서 반복재생 되었다. [...사람 사는 거 다 똑같죠, 뭐. 똑같은데.. 전 유달리 좀 고달팠어요]

생각을 하다보니 어느덧 또 12시를 알리는 시계가 댕- 댕- 울렸다. 오늘도 이렇게 하루가 끝났구나. [아저씨는 몇시를 제일 좋아해요?] [오전 12시 30분] [왜 하필 12시 30분인데요?] [하루 중 가장 어두운 시간이라서] [밤에라도 밖에 나가면 되잖아요] [싫어. 할 것도 없는데 뭣하러] [으휴. 그러니까 사람이 이렇게 우울하고 창백하고 혈색도 없지] ...나갈까. 처음으로 고민했다. 그래. 나는 지금 피가 너무 먹고 싶어서 사냥을 가는거야. 다른 의도는 없는거야. 한달만에 현관으로 향했다.

너와 걸었던 길에 도착하니 12시 30분이었다. 밤하늘이 참 깜깜했다. 사람이 많이 없어 관리가 제대로 안되는지 가로등 불이 깜빡, 깜빡거렸다. 확실히 나와서 뛰기 시작하니 잡생각이 그나마 덜 났다. 그렇게 한 10분째 뛰고 있었나. 어느 순간 내 뒤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먹잇감이 자기 스스로 굴러왔네..' 나를 따라 점점 빨라지는 발소리를 듣고 일부러 속도를 줄였다. 예상대로 더 가까워져갔다. '잡았다' 날카로운 손톱을 드러낸 채 팔목을 움켜잡았다. -아악! '뭐야' -아 아프잖아요!;; 아저씨 맞네 진짜 이씨 . '니가 왜 또 여기 있는거야' -아저씨야말로 뭐하는데요. 아니, 친구 하자면서요 '그랬지' -내 집주소 알죠. '그때 데려다줬잖아' -내 이름도 알고. 나이도 알고? '그치' -근데 왜 안 찾아와요? 한달동안 숨어있었어요? 나랑 친구한 거 후회해요? 집에 가서 막 괜히 했다 싶고 그랬어요? '...잠깐, 조금'

-진짜 너무해요. 나는 특별한 비밀친구 생겼다고 좋아했는데. 말했잖아요, 나 외롭다고. 연락하고 싶은데 연락 방도도 없고. 아저씨 집도 모르고 아는 거라곤 이름 뿐이라 찾아갈 방법도 없었다고요. 그럼 아저씨가 왔어야죠 '...듣고보니 일리 있는 말이야. 미안. 인간 친구는 누나 다음으로 처음이라' -그렇게 말하면 다 풀리잖아요. 내 손목은 어쩔거에요! 빨리 회복 능력 같은 거 써봐요 '그런 거 못해' -순간이동은 하면서 왜 이건 안되는 건데요 '인간에 관한 능력은 없어' -왜 하필.. 너무 꽉 쥐었었는지 손목을 내려다보니 피가 흐르고 있었다. 어쩐지 좀 맛있는 냄새가 나더라.

'그래서, 이거 어떡해?' -이거? 이거라뇨. '먹을까?' -미쳤어요? '농담이야' -아니잖아요 '맞아' -죽을래요? 절.대. 안돼요 '아쉽지만, 알았어 그럼. 가자' -? 어디를요 '서울' -에? 뭔, '나 잡아'

. '오랜만이라 안되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이네' -미친. 진짜 대박이다.. 서울대병원을 1초만에... '가자. 응급실은 저쪽' -근데요, 어차피 응급실 갈거면 서울대병원이나 집 앞 큰 병원이나 뭐가 달라요? '몰라. 아는 큰 병원이 여기밖에 없어' -알면 알수록 골때린다 참.. . [어머 손목에 구멍이... 사나운 짐승한테 물리셨나봐요] -비슷하죠 뭐ㅎ '야' -뭐요 '뭐요?' 갈수록 건방져지는 게 마음에 안 들었지만 나 때문에 다쳤으니까 참기로 했다.

치료를 받고 병원을 나왔다. -에휴.. 이 늦은 시간에 이게 무슨 일이람... '맛있는 거 사줄게' -갑자기요? '이 수법이 인간들한테 먹힌다고 들었는데 아닌가보네' -... '너 꼬르륵 소리 났,' -쉿. 사주세요, 다 먹을거에요 나. 근데 이 시간이면 문 연 데도 없을텐데.. . -이야... 이런 양심 없는 아저씨를 봤나. 슈퍼로 때우시네 '그래서 이만원이나 긁었니?' -집에 쟁여놓고 먹을거에요. 어제도 한끼밖에 못 먹었단 말이에요.. '먹지 그랬어' -돈이 없었다구요. 엄마가 좀 아팠어서 그동안 모은 돈 전부 드렸단 말이에요 '그럼...지금 많이 먹어' -그러려구요 '....잘 먹네' -아저씬... 살면서 돈 걱정 안해봤죠 '인간도 아닌데 무슨. 쓸만한 곳도 없고, 지 혼자 생겨나고 불어나고 엄청 모여서 나한텐 거의 휴지조각이지' -휴지조각...저는 그 휴지조각 때문에 하루하루 죽겠는데.. '....' -....술도 사주실래요..? '안돼' -까비

'아무튼 그래서. 이제 니 앞에 얼마나 자주 나타나줘야 해?' -제가 안그래도 생각을 좀 해봤는데, 우리 룰을 좀 만듭시다 '룰?' -일단 제일 중요한 첫번째. 연락은 제가 하면 다 받아주기. 번호 알려줘요 '휴대폰 없어' -무슨 휴대폰도 없...이 아니라 연락할 사람이 없구나. 내일 당장 사요. 여기 내 번호 적어줄테니까 그 번호로 메일 보내요 알았죠? '허..' -그리고 두번째. 3일에 한번은 만나기 '너무 많아. 줄여' -아저씨 할 일도 없잖아요 어차피! '니가 잊었나본데, 나 원래 1년에 한번씩 외출해. 원래 인간들은 친구끼리 그렇게 자주 만나나? 귀찮게' -이정도로 자주는 아니긴 한데.. 그럼 일주일에 두번? 그래도 미안하니까 하고싶은 말은 잠시 삼키기로 했다. '후.. 그래 다음은?' -세번째. 무조건 해가 졌을 때 만나기. 이건 아저씨 배려했다 내가 '대단한 배려 하셨네' -그쵸 '하는 김에 나도 추가하면 안되나?' -뭔데요? '아저씨 금지' -싫어요 '...'

'더 없지?' -아직 생각나는 건 여기까지니까, 나중에 차차 더 정해요 '다 먹었어?' -보시다시피 '기분은 좀 풀렸나보네' -넹. 아저씨, 나 데려다줄거죠? '너 나 택시 취급할거지 앞으로도' -막차 끊기고 지하철도 멈추고. 택시비도 없고, 그럼 아저씨밖에 없죠ㅎ 생각해보니까 멋대로 여기에 데려온 것도 아저씨면서 '니가 다쳤잖아' -헐. 내 손목이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는데 '놀래키지 말았어야지. 뛰어오면서 소리쳤어야지, 너라고. 너 그거 잘하잖아' -뭐요?! 아깐 미안하다면서요!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아닌 것 같아' -허? '걸어가기 싫으면 빨리 잡아. 놓고 간다'

-어차피 데려다 줄거면서... 하여튼 못됐네요 '그런 편이지' -진짜 아저씨는 나같이 착한 인간 친구 둬서 좋겠어요. 아저씨의 그 지랄... 아니 더ㄹ, 아니 나쁜 성격까지 받아주는 참된 인간 '중간에 진심이 막 섞였네?' -하핫.. '정말 희대의 막말이네. 난 너만큼 겁없는 개막장 인간을 처음 봤는데. 처음 만난 날에 친구라니. 그것도 내가 무려 인간 피를 빨아먹는 종족인데' -그게 중요한가. 사람 뜯어먹는 야생동물이랑 사람이랑도 종종 친구 먹는데요 뭐 '내가 동물이다?' -그게 아니고... 그 무서운 야생의 호랭이, 사자, 곰 이런 애들도 인간이랑 친구 먹는 경우가 있다 이거죠 '걔네가 사람을 찢는 경우는 직접 못 봤나봐? 난 자주 봤는데' -한마디도 안 져주네요.. '어쨌든. 언젠간 알게 되겠지만 넌 그래도 다른 뱀파이어들이 아닌 날 만나서 정말 다행인거야' -네? '..집이나 가 꼬맹아. 3시 넘었어 지금'

그날 이후로 우리는 부쩍 가까워졌다. 너 때문에 휴대폰도 샀다. -여보세요? 아저씨? 휴대폰 샀어요?! '그래. 집 앞이야' 너 때문에 알바도 처음 해봤다. '14개월이 햄버거를 어떻게 먹어 진짜 빡대ㄱ,' -즈승흠느드^^ 즈그 즈믄 드으드르긌슴느드.. 너의 눈물도 구경했고 '받아' -웬 돈..? '모아놓은 알바비' -아저씨 알바비를 왜 저한테 줘요 '처음부터 그러려고 했어. 필요하다며 돈' -아저씨.. '...뭐야 너 왜 울어' -조용히 해요... 너의 미소도 구경했다. -어릴 때 엄마랑 오빠랑 온 뒤로 처음 와요.. 여기 단풍나무 되게 이쁘죠 '그러네. 이쁘네' -에휴.. 좀만 덜 바빴어도 매년 오는건데 '앞으로 나랑 매년 와. 그러면 되지' -오~ 말이라도 고맙네요. 웬일로 이런 말을 다 '친구끼리 원래 이런 데 오는 거 아닌가' -여자친구 없는 거 티내는 거에요? 누가 이런 데를 친구랑 와요ㅋㅋㅋ 연인이랑 오지

(1995.12.24 / 11:59) 3 2 1 -아저씨! 메리크리스마스! '그래 너도' 반짝이는 색색의 불빛 사이에서 신나서 웃던 너의 입꼬리가 천천히 내려갔다. -아저씨 '응' -.... '뭔데. 말해' -...나 아저씨한테 많이 고마워요. 보다시피 성격도 이렇고 표현도 잘 못해서 그렇지. 다 고마워요 '뭐가 그렇게 고마워. 아직 한 것도 많이 없는데' -제일 큰 건, 나 살려줬잖아요 아저씨가 '...아.. 그랬지' -고마워요. 그때 살려줘서. 그리고, 친구 해줘서. 오늘 크리스마스니까 한번 얘기해봤어요 '그게 그거랑 무슨 상관인데..' -원래 크리스마스는 자기 속마음 고백하는 날이에요. 아저씨는 나한테 뭐 고백할 거 없어요? 나는... '....나중에 할거야' -뱀파이어답게 재미없네요.. 그래라요 나는 끝내 대답하지 못했다

.

너의 마음을 알아채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자꾸 내게 사소한 투정을 부렸고, -아저씨 집 알려주면 안돼요? 나도 아저씨 데려다주고 찾아가고 하고 싶은데 '집은 알려줄 수 없어. 그냥 내가 데려다줄게' -치... 내 얼굴을 이유 없이 빤히 쳐다봤고, -네....네? '너 뭔 생각해 계속' -아 그 저기 뭐냐.. 그... '...?' 평소 하던 질문도 점점 달라져갔다. -아저씨. 아저씨는...연애 안해봤죠..? '밖에를 나가야 연애를 하지' -아니, 그전에요 '안했어' -진짜요? ..그럴 줄 알긴 했어요ㅎㅎ '욕이야?' -아뇨~ 그럴리가요! 좋아했던 사람도 없었죠? '그건 있었어' -.... '.....' -...있었다고요? 누군데요. 이뻤어요? '...죽었어' -아니. 이뻤냐고요 '왜 이래' -그랬나보네... 아저씨 진짜 눈 높을 것 같아요 '뭔,' -그만. 얘 설마 나 좋아하나.

아니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설령 맞다고 해도, 아는 척 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그 마음은 받아줄 수 없었으니까. 겨우 사귀게 된 유일한 친구를 잃고 싶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너는 아니였나보다. . (1996.6.29) -좋아해요 '..뭔 소리야' 애써 부정했다. '착각이야. 거의 매일 붙어있었어서 순간 스치듯 찾아온 감정' -그걸 아저씨가 어떻게 아는데요. 왜 아저씨가 그래요 내가 좋다는데 '...그래서? 뭐 어쩌라고' 말이 세게 나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서로 언성을 높였다. -뭐요? '사귀기라도 할거야? 연인 할거야 우리 둘이? 현실을 좀 봐. 세상엔 너와 같은 인간인 남자가 절반이야. 니가 전에 말했잖아, 우리 나이 차이 생각해보라고. 너 그거 진심 아니야' -아저씨.

'너도 알잖아, 우리가 이것보다 더 깊은 사이가 되었을 때 끝은 결국 어떻게 될지. 그리고 무엇보다 난 너한테 그런 마음 없어. 넌 나한테 좋은 인간 친구야. 선 유지하자' -...그동안 했던 말들 생각해봐요. 오해할 만 했잖아요. 아저씨는 오랫동안 살아서 이런 감정이 사소하고 하찮겠지만, 남탓으로 보이겠지만 나는.. 나한테 이렇게 잘해준 사람도, 가까이 있어준 사람도 아저씨가 처음인데... '친구는 니가 먼저 하자고 제안했고, 나는 처음에 잠시 후회했어. 하지만 너와 시간을 보내다보니 점점 즐거워졌고 너와 친구하길 잘했다고 생각했어. 그 마음을 전한 것 뿐이야. 오해하게 했다면 미안' 더더욱 퉁명스레 말했다. 너는 잔뜩 상처 입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진짜 나쁘다. 내가 그렇게 별로에요..? 거절할 줄 알았지만.... 이렇게나 싫어하다니 상처네요.. '.....'

네가 간절하게 물었다. -한번만 더 물을게요. 아저씨. 단 한순간이라도.. 나를 좋아한 적 없었어요? 너의 눈물은 기어코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는 천천히 운을 뗐다. '내가 너랑 닮은 점이 많다고 했었잖아. 난 너처럼 세상에 어머니와 누나밖에 없었어. 그런데 나와 아버지가 요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인간이였던 어머니와 누나가 마을 사람들에게 죄없이, 아주 끔찍하게 죽임을 당했어. 어렸던 나는 소중한 사람들을 잃었다는 생각에 깊은 무력감에 빠졌고, 애초부터 사이가 그닥이였던 아버지와도 등 돌리게 되었어. 그러고 나니까 내게 남은 사람은 나 하나 뿐이더라. 처음엔 외로워서 죽고 싶었어. 그다음엔 그리웠고, 괴로웠고, 죽을 수 없는 나 자신이 한심했고, 인간의 피를 빨때마다 어머니와 누나 생각이 나 구역질 났고. 나중엔 그것들에 전부 무뎌지고 말았어. 그저 앉아있다가 누워있다가 서있다가. 나는 나 자신까지도 잃고 말았어. 그렇게 몇백년을 혼자 살아남았어'

'그랬던 나의 세상에 네가 들어온 건 너의 생각보다, 그리고 나의 생각보다 내게 훨씬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어. 너와 있으면 나를 되찾는 기분이였으니까. 나는, 더이상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너는 내게 기회야. 너랑 계속 친구 하고 싶어. 매일 새롭고 특별한 내일이 찾아오게. 인간처럼 희노애락을 느끼고, 즐겁다는 듯 웃어도 보게. 그러니까 넌 나랑 친구 해줘, 평생' -아저씨, '내가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는. 아까 물었지, 널 단 한번이라도 그렇게 본 적 없었는지' 어쩌면 꽤 여러번 있었겠지만 나는 결국 이런 뻔한 대답을 했다. '없었어. 한 순간도'

내 대답을 들은 너는, 끝내 고개를 떨궜다. -아저씨 마음 이해해요 애써 눈가를 벅벅 문지르며 말하는 너였다. -생일 축하해요 '..미안하다' -사과 하지마요. 더 잔인해요 '..그래' -까일 거 알았고 이기적인 것도 아는데, 한편으론 같은 마음이길 바랬어요. 아주 조금요 '....' -그래도 이렇게까지 불편해질 줄 몰랐는데.. 좋은 날 초쳐서 미안해요 그러면서 내게 선물을 건네주었다. -선물이에요. 돈 벌어서 나중엔 더 비싸고 좋은 거 사줄게요 '...' -그리고 한동안은 찾아오지 마세요. 나도 나름 차인건데 '...야' -걱정 마요, 29살이 찌질하게 이런 일로 계속 얼굴 안 보려는 거 아니니까. 정리되면. 내가 어느정도 마음 접고 아저씨도 그러면, 그때 만나요. 갈게요. 떠나는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봤다. 쥐었던 손을 펴니 코팅된 네잎클로버와 은행닢, 단풍잎 등이 담긴 작고 예쁜 유리병이 있었다.

.

잠시 네가 없는 일상으로 돌아온 나였다. 네가 보고 싶었다. 거의 매일 봤었는데. 그래서인지 빈자리가 너무나도 컸다. 오랜만에 보내는 혼자만의 하루하루는 가늠치 못할만큼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각자의 시간을 가지는 동안, 너처럼 나도 혼란스러운 내 마음과 지금 이 감정들을 정리해야했다. '...하...' 왜 점점 약해질까. 점점 내 세상을 하나씩, 또 하나씩 차지하는 네가 혹시라도 내게 소중한 사람이 될까봐. 내 세상의 전부가 되어버려 네가 사라졌을 때, 내가 또 죽을만큼 슬플까봐. 두려웠다 그렇다면 내가 그날 너를 거절했던 이유는 두려움이였구나. 하나뿐인 친구를 잃게 될까 하는 두려움. 그래서 또 혼자가 될까 하는 두려움. 네가 내게 전부가 되어버릴까 하는 두려움.

(1996.12.23) 끝이 났다. 이제 드디어, 내가 경험하고 있는 이 모든 감정을 인정하게 되었다. 끝없이 부정만 했던 나는 이 마음을 너에게 전하고 싶었다. 더는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내일 만날 수 있어? 집 앞에서 기다릴게] 몇달간 지웠다 썼다를 반복하던 메일을 오늘에서야 보내고 말았다. . (1996.12.24) '분명 읽었는데.. 왜 안 나오지' 휴대폰을 켜서 [네] 라는 단답이 떠있는 걸 다시 확인했다. 아직도 나랑 만나기 껄끄러운가. 너는 정리가 덜 됐는데 내가 됐다고 일방적으로 군건가. 조금 속상한 마음에 입술을 달싹였다. '3시간도 넘었는데..' 손이 조금 시려워 주머니에 넣었다. 한참을 기다렸다. 그러다 우연히 네 어머니와 마주하게 되었다. [누구...?]

수상하게 보시기 전에 친한 선배라 급히 둘러댔다. 어머니는 끄덕이시며 네가 장갑을 사러 좀 전에 나갔다고 말해주셨다. 그리고, 무언가 머뭇거리시다가 이내 물어보셨다. [친하다고 해서 물어보는건데, 최근에 우리 딸한테 무슨 일 있었니?] '...네?' [아니, 독립한 후로 이렇게 가끔 반찬이나 갖다주러 왔는데.. 얘가 요즘 몇달간 계속 무기력하고 내가 올 때마다 잠만 자고 있는거야. 꿈에는 누가 자꾸 나오는가 어찌나 아저씨 아저씨 찾아대는지.. 도대체 걔가 누구냐 물으면 입을 앙 다물지를 않나. 학생은 알아?] 뜻밖의 얘기에 생각회로가 멈췄다. '....아' 정지된 채로 아무 말 않고 서있는 나를 걱정스럽게 쳐다보셨다. [학생....? 괜찮아?] '...네. 저는... 아는 게 없어서요.. 죄송합니다' 만감이 교차했다.

너를 찾아 길거리를 방황했다. '오늘이 지나면 안되는데...' 처음으로 내게 인간을 찾아내는 능력이 없는 것에 한탄했다. 동네를 전부 돌았다. 크리스마스라 어디에나 인간들이 붐벼 힘들었다. 사람은 이렇게 많은데 너만 없었다. 하늘도 이미 어두워진지 오래였다. 서서히 발걸음을 멈췄다. 아무래도 오늘 너를 만나기는 어려울 것 같아서. '보고 싶어..' . -...아저씨? 손에 빨간색 벙어리 장갑을 낀 네가 서있었다. 거짓말 같았다. '...너 대체....지금까지..' -에..? 일찍 왔네요? 전 아저씨 밤 늦게 올 줄 알고 잠깐, 네 말이 끝날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하나도 변하지 않은 너의 모습이 고마워서. 어제 헤어졌다 만난 것처럼 똑같아서. 너를 꽉 끌어안았다. -..아저씨...?

'...' -.... 너는 얼결에 잠깐 안겨있다가, 이내 벗어나려 했다. -...이러지 맙시다, 우리. 친구 사이에 누가 이래요 불편해지게. 그 말은, 내게 너무나도 아프게 들렸다. 네가 이렇게 날서게 구는 것도 선을 긋는 것도 내가 자초한 일임을 알기에. 내가 쏜 화살이, 결국 내게 박힌 것 같기에. 멋대로 네 손을 잡았다. '...사람 너무 많다'

-아저씨. 네가 조금 화난 말투로 말했다. -누가 멋대로 이러라고 했어요. 나 가까운 데 걷고 싶어요, 다시 데려다줘요 '싫어' -하... 진짜 왜, '너도 작년에 이런 반짝거리는 예쁜 곳에서 나한테 고백했었잖아' -.... '나도 이런 데에서 할거야' -...뭐요..? '크리스마스는 자기 마음 고백하는 날이라며' [원래 크리스마스는 자기 속마음 고백하는 날이에요. 아저씨는 나한테 뭐 고백할 거 없어요?] [....나중에 할거야] 너는 그제서야 생각났다는 듯 나를 올려다보았다. 네 눈을 바라보며 내 말을 이어갔다. '후회했어, 그동안. 네가 이미 나한테 걷잡을 수 없이 큰 존재가 되어버린 줄 몰랐거든. 그렇게 걱정했는데, 이미 그렇게 되어버린 것 같아' -... '지루해 죽겠어도 그냥 그런대로 살았던 내가 너에게 완벽하게 맞춰져서, 자꾸 너를 떠올려서 처음부터 친구 하지 말걸 하면서 후회했어' -...친구도 하지 말자고 부른거에요..? 한다는 고백이..

너의 코 끝이 붉었다. '아니. 내가 너에게 말하고 싶은 건 그게 아니야. 그 이후엔 널 잡아야겠다고 생각했으니까. 전에 네게 친구로 남자고 한 이유였지만, 깨달았어. 나에겐 나보다 네가 더 소중한 것 같아' 조금 서글퍼진 마음에 고개를 떨구고 말을 이었다. '너의 세상에는 나도 있고, 가족도 있고. 지인도 있겠지만, 내 세상엔 너밖에 없어. 눈 감을 때도, 눈 뜰 때도 니 생각을 해. 나한테는 너뿐이라' -....그러니까..지금 이게...

'좋아해' '네가 날 좋아한다고 말하기 전보다 더 이전부터 너를 사랑하고 있었어. 내가 널 더 먼저 좋아하고 있었어. 그리고, 더 많이. 나도 이런 적이 처음이고.. 그래서 두려웠고... 내 감정보다 걱정이 앞섰던 게 사실이야. 그런데 이젠 아니야. 너는 언젠가 나를 떠나겠지만 남은 시간들은 전부 너와 보내고 싶어졌어, 가능한 오래. 이런 감정에 서툴러서 상처 주게 된 거 미안해. 니가 싫으면 나는 그냥,' -아니아니 아저씨.. 잠깐만요 내 말을 끊는 너였다.

'싫어?' 내 물음에 네가 개미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요. '안 들려' -후...좋다고요.. 도망가고 싶으니까 제발 그만 말해요 '그래 그럼' 그동안 말 못한 마음들을 전부 털어놓은 나는 너무나도 시원했고, 생각보다 태연했지만 너는 새빨개진 얼굴로 과거의 네 모습을 떠올리며 성찰하기 바빴다. -와 이거...엄청 이기적인 거였어.. 분위가 조금 풀렸고, 괜히 놀리고 싶었던 나는 얼굴을 들이밀었다. '부끄러워?' -쳐다보지 마요 진짜 짜증나니까.. 하여튼 차는 것도 자기 멋대로 고백도 자기 멋대로... '괜히 툴툴대니까 더 놀리고 싶다' -하지마요 '보고 싶었어' -하지 말라고 했어요 진짜 '키스해도 돼?' -하지...에? 이미 놀란 네가 더 놀랄까봐 아주 천천히, 조심스레 포갰다. 눈이 땡그래진 모습이 귀여웠다. 우린 함께 눈을 감았다.

(1996.12.26 / 00:00) 그렇게 크리스마스는, 우리의 첫 입맞춤으로 끝이 났다.

총 14개의 댓글

  • 도옹ღ 24.03.17

    선생님 후편도 있나요? 외전도 있나요? 쩨발...🙏🙏🙏 필력 뭐냐구요...ㅠㅜㅠ💚💚💚

  • 🐱텐냥이 24.03.17

    스토리 미춌어으요!! 너무 재밌어용💚💚💚💚

  • 잼즈 24.03.17

    선생님 잇잔아요 이거정말 미친스토리 천천히 쓰든 개빨리 쓰든 얌전히 기다리겟음. 과몰입 개오져요

  • BZ 24.03.23

    쌤 진짜 이걸 이제야 본 제 뺨을 칠게요 사랑해요 진짜. 아무래도 나 햄찌님이랑 결혼해야겟써. 혹시 여유 조금 있으시면 혼인신고서만 쓰면 되는데 결혼하실래요?아니다.그냥 제가 납치해갈게요 납치하고 봅시다~

  • 엥시리- 24.05.12

    쌤 담편 언제 나오나요ㅜㅠ 이걸 지금 본 제가 너무ㅜㅜ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