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꼬기왕자이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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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첫사랑> _ 4화

#이한

4화. 고백 7월 초, 장마가 시작되었다. 교실 창밖으로는 연일 비가 쏟아졌고, 복도는 젖은 우산으로 인해 눅눅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한의 하루는 자꾸만 들떴다. 아침에 하나와 눈이 마주친 그 짧은 순간, 점심시간에 우연히 마주친 손끝, 그리고 퇴근길 우산을 나누는 그 몇 분 동안. 평범했던 하루의 조각들이 하나씩 빛나고 있었다. ⸻ “하나야, 너 오늘 미술부 끝나고 시간 돼?” 이한은 수줍게 물었다. 복도 끝, 미술실 앞에서 하나가 그림을 정리하던 시간이었다. “응? 왜?” “그냥… 같이 가고 싶은 데가 있어서.” 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눈빛은 여전히 조용했지만, 마음 한쪽이 작게 떨리고 있었다.

방과 후, 두 사람은 함께 학교 뒤 언덕길을 걸었다. 거기엔 작은 폐정원이 있었다. 오래된 벤치, 덩굴이 휘감은 담장, 그리고 고요한 햇살. “여기, 예쁘다…” 하나는 숨을 죽이며 말했고, 이한은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네가 좋아할 것 같아서. 여기, 나 혼자 자주 왔거든. 기분 복잡할 때.” “왜 나한테 보여주는 거야?” 이한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그냥… 너랑 이런 공간, 같이 보고 싶었어.” 하나는 그의 말을 가슴에 꾹 눌러 담았다. 그 감정은 낯설었고, 동시에 따뜻했다.

잠시 후, 이한이 조심스럽게 꺼낸 그림 한 장. “이거… 너야.” 종이 위엔 연필로 정성스럽게 그려진 하나의 얼굴이 있었다. 그녀가 웃는 모습이었다. 지난번 미술 시간과는 달리, 이번 그림 속 하나는 확실히 웃고 있었다. “…나, 이렇게 웃고 있었어?” “응. 그날 너, 나한테 웃었잖아. 처음으로.” 하나는 조용히 그림을 내려다보았다. 한참을 말없이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 네 앞에선 이상하게 겁이 안 나.” “…” “오해받는 것도, 다가가는 것도, 실수하는 것도… 너한테는 그냥 다 말해도 될 것 같아.” 이한은 손끝을 움켜쥐었다. 심장이 터질 듯 뛰고 있었지만, 그는 애써 담담하게 말했다. “나도 그래. 너한텐 그냥… 진짜 내가 되어도 될 것 같아.” 그리고,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래서 말할게. 하나야, 나 너 좋아해.”

말은 작았지만, 그 울림은 컸다. 하나는 숨을 멈춘 채 그를 바라봤다. 눈이 조금 흔들렸다. 하지만 곧,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나도. 너 좋아해.” 그 순간, 아무 말도 없었다. 오직 서로의 눈빛만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 그날 저녁, 하나는 창가에 앉아 빗소리를 들으며 중얼거렸다. “진짜로… 내가 누군가를 좋아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밖은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마음속은 맑은 하늘 같았다. 그 날, 이한의 손끝에서 건네받은 작은 고백은 하나의 세상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반면, 이한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친구 태산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 진짜 미쳤다. 나 걔랑 사귀게 됐어.” “뭐? 하나랑? 헐, 대박… 어이없을 정도로 부럽네.” “내가 고백했는데, 걔가… 좋대. 웃으면서.” “미쳤다. 진짜.” “응. 나 지금 심장도 미쳤어.” 전화기 너머 웃음소리보다 더 크게, 이한의 얼굴에는 쉴 새 없이 미소가 번졌다. ⸻ 그리고, 그 여름의 한복판. 조용하고 서툰 두 사람의 첫사랑이, 드디어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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